우리동소개
주민과 함께하는 언제나 가족같은 북구북구 두암3동

연혁
- 조선 후기 : 이 지역은 광주군 편방 왜지 경양면에 속했다. 당시 이곳에 대독산, 소독산, 평촌마을이 있었음
- 구 한 말 : 오치면 송정 문산리, 서양면 신흥리, 두방면 각화리가 있었음
- 1914. 4. 1 : 조선총독부의 행정구역 통페합에 따라 오치면 문산, 송정, 용주리 서양면 신흥리, 두방면 각화리 각 일부는 서방면 문흥리가 되고, 두방면 각화리, 오치면 문산리 각 일부가 서방면 각화리가 됨
- 1935.10. 1 : 광산군 서방면 각화리가 됨. 광주읍이 광주부로 승격돼 광주군은 광산군이 됨
- 1955. 7. 1 : 광주시 풍향출장소 관할 문흥.각화동이 됨 광주시지역 확장에 따라 광산군 서방면이 광주시로 편입되면서 주민들의 편의를 위해 풍향출장소를 설치함
- 1957.12. 2 : 본청직할의 문화동이 됨. 122개 동을 51개 운영동으로 축소함에 따라 문흥.각화.두암동은 문화동 관할 법정동이 됨
- 1961. 3.10 : 북부 출장소 관할이 됨
- 1973. 7. 1 : 구 제도에 따라 문화동은 동구 관할이 됨
- 1980. 4. 1 : 동구 관할의 문화동은 신설된 북구 관할이 됨
- 1985.11. 1 : 두암동이 문화동에서 분리됨
- 1986.11. 1 : 광주시가 광주직할시로 승격되어 광주직할시 북구 두암동이 됨
- 1989. 5.11 : 두암동이 두암1동, 두암2동으로 분동
- 1995. 3. 1 : 급속한 인구증가로 두암1동이 두암1동, 두암3동으로 분동
유래
본래 광주군 두방면(斗坊面) 지역으로서 길가에 있는 말머리처럼 생긴 큰바위인 말바우를 한자지명으로 풀어 두암(斗岩)이라 했다.두암동은 풍수지리상 명당으로 소문이 났다. 장원봉에서 달려온 용이 군왕봉에 이르러 좌우로 뻗쳐 좌청룡 우백호가 되고, 우산동의 소산.무냉이등 범덕등이 북서쪽 벌판에서 부는 찬기를 막아주는 안산(案山)이 된다. 여기에 솔샘(松泉)이 수구혈(水口穴)이 되어 예부터 세 정승이 나온다하여 삼정골이란 땅이름도 있다.
불당골에서 발견된 토기굽는 터는 이곳이 매우 오래 전부터 삶의 터전이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거치들골, 삼정골, 오리잿골, 좁은골에서 흐르는 시냇물을 받아 계단식 경작지를 마련하여 농사를 짓던 터인 사다릿들이 있고, 점차 북서쪽의 들판으로 나서 감남들이, 구횟들, 거처울평을 일구었다. 구 운전면허시험장만이 외롭게 있던 이곳은 1980년대 대규모 택지조성사업이 시작되면서 쾌적한 주거공간으로 주목되는 신흥아파트단지가 되었다.
으뜸마을인 두암마을과 그 동남편 월등마을, 삼정사 서편에는 삼정과 송강마을이 있다. 두암 동북녘 독틈에서 물이 새어 나오는 독시암과 그 위쪽으로 참팽이골이있고 두암 동남쪽에 있는 대포리봉 남녘 골짜기에는 밤실마을이 있다.이곳은 현재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