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지정문화재
전체 16건, 현재 페이지 1/2
-
중흥산성 쌍사자석등 (국보 103호) 석등은 부처의 광명을 상징한다 하여 광명등(光明燈) 이라고도 하며, 대개 대웅전이나 탑과 같은 중요한 건축물 앞에 자리한다. 일반적으로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로는 3단을 이루는 받침돌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을 올린 후 꼭대기에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한다. 이 석등은 큼직한 연꽃이 둘러진 아래받침돌 위로 가운데기둥 대신 쌍사자를 조각한 것이 특징이다. 두 마리의 사자는 뒷발로 버티고 서서 가슴을 맞대어 위를 받치고 있는 모습으로, 사실적이면서 자연스럽게 표현되어 있어 주목 바로가기
-
정지장군 갑옷 (보물 제336호) 갑옷이란 싸움터에서 적의 화살이나 창, 검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하여 입었던 보호 장비로, 이 갑옷은 철판과 철제 고리를 엮어 만든 경번갑이다.정지장군 갑옷(鄭地將軍 甲衣)의 주인인 정지장군은 고려 충목왕 3년(1347)에 태어나, 왜구를 물리치는데 큰공을 세웠으며 공양왕 3년(1391)에 세상을 떠났다. 이 갑옷은 장군이 왜구를 물리칠때 직접 착용했던 것으로 후손에 의해 전해진 것이다. 총 길이 70㎝, 가슴둘레 79㎝, 소매길이 30㎝로 세로 7.5∼8㎝, 가로 5∼8.5㎝의 철판에 구멍을 바로가기
-
광주 충효동 요지 (사적 제141호) 무등산 북쪽 충효동에 자리잡은 가마터로, 고려 후기에서 조선 전기까지 상감청자·분청사기·백자를 굽던 곳이다. 가마의 구조는 사람이 드나드는 출입시설·도자기를 집어넣는 번조실·굴뚝실로 이루어져 있으며, 둥근 무덤 형태가 연결된 모양으로 되어 있다.『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과 출토유물의 연도를 통해 1430년을 전후해 만들어지기 시작된 것으로 보고있다. 그 후 약 70∼80년간 자기제작이 지속되다가 16세기 초에 중단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초기에는 분청사기만 만들다가 백자가 생산되기 시작하면서 같이 바로가기
-
광주 환벽당 일원 (명승 제107호) 환벽당은 사촌 김윤제(沙村金允悌, 1501~1572)가 노년에 자연을 벗 삼아 후학양성을 목적으로 건립한 남도지방의 전형적인 유실형(有室形)정자로 가까이에는 무등산 원효계곡의 계류가 흐르며 계곡아래 증암천(甑巖川) 주변에는 배롱나무가 아름다운 장관을 이뤄 자미탄(紫薇灘)이라 불렀으며, 특히 이곳은 무등산을 비롯한 원효계곡의 줄기를 따라 자연 풍광이 수려한 지역으로 예로부터 시인묵객들이 자주 드나드는 명승지였다.환벽당 북쪽으로 200미터 떨어진 곳에는 사촌 김윤제가 살았던 충효마을과 증암천 너머에는 바로가기
-
광주 충효동 왕버들 군 (천연기념물 제539호) 광주 충효동 왕버들 군은 충효마을의 상징숲이자 비보(裨補)숲으로 조성되었으며, 김덕령 나무라고도 불리우는 등 나무와 관련된 유래나 일화들이 잘 전해지고 있어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크다.또한 수령이나 규모면에서 현재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되고 있는 왕버들과 비교했을 때 우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수형 및 수세 또한 양호한 편으로 생물학적 가치도 크다. 본 저작물은 "공공누리" 제1유형:출처표시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바로가기
-
김덕령장군 의복 (국가민속문화재 제111호) 1965년 광산김씨의 무덤들이 모여있는 광주 무등산 이치(梨峙)에서 김덕령 장군의 묘를 이장할 때 출토된 400년 전의 의복들이다. 김덕령(1567∼1596)은 임진왜란때 담양에서 이름을 떨친 의병장으로 비록 체구는 작지만 민첩하고 능력이 탁월해 왜병장들은 그의 얼굴만 보고도 무서워 철수했다고 한다. 선조 28년(1595) 적장과 내통한다는 억울한 죄를 뒤집어쓰고 체포되어 이듬해 옥사하였다. 영조때 그의 무고함이 밝혀져 병조판서로 추증되었고 광주 의열사에 그의 위패를 모셨다. 출토된 그의 의복에는 바로가기
-
장흥임씨 묘 출토복식 (국가민속문화재 제112호) 임진왜란때 의병장이였던 김덕령(1567∼1596)장군의 조카며느리인 장흥 임씨(任氏)의 묘에서 출토된 유물이다. 저고리 2점, 속바지 2점, 목면철릭 1점, 직령포 1점과 머리싸개, 멱목 등의 수의용품 17점이 출토되었다. 유물중 철릭은 임진왜란전에는 여자들도 철릭을 착용했음을 밝혀주는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으며, 목판깃과 반달깃 저고리가 함께 출토됨에 따라 서로 다른 깃이 같은 시대 존재했음을 알려 주고 있다. 또한 출토된 속바지 2점은 시흥의 동래 정씨(鄭氏) 묘소에서 출토된 아래가 터 바로가기
-
고운 묘 출토유물 (국가민속문화재 제239호) 조선 중기 호남사림의 대표적 인물이었던 고운(高雲)의 무덤에서 출토된 옷과 유물들이다. 고운(1479∼1530)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 고경명의 할아버지로 조선 중종 기묘사화 때 화를 입어 벼슬을 잃고 고향으로 내려 왔다가 중종 25년(1530)에 죽었다. 이 유물들은 1986년 9월에 문중에서 묘지를 옮기다가 발견되었다. 옷들은 포(袍)의 일종으로 옷깃이 둥근형태의 옷인 단령 1점, 옷깃이 곧은 형태의 옷인 직령 2점, 웃옷에 치마가 연결된 형태의 옷인 철릭 6점, 직령과 비슷하나 소매가 짧은 바로가기
-
화순 대곡리 청동기 일괄(국보 제143호) 전라남도 화순군 대곡리 영산강 구릉에서 발견된 청동기시대의 무덤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이다. 출토된 청동기 유물 중 세형동검(청동검) 3점·청동팔령두 2점·청동쌍령구 2점·청동손칼(청동삭구) 1점·청동도끼(청동공부) 1점·잔무늬거울(청동세문경) 2점이 국보로 지정되었다. 세형동검은 양 끝에 날이 서 있으며, 그 중 1점은 칼날 부분이 손상되어 있다. 동검 중앙에 굵게 나온 등대의 모습이 칼마다 다른 것이 특징이며, 한국에서 출토되는 동검으로는 시대가 늦은 편이다. 청동팔령구는 8각형의 별모양으로 생 바로가기
-
필암서원 문적 일괄 (보물 제587호) 필암서원은 조선 선조 23년(1590)에 창건되고, 현종 3년(1662)에 왕에게서 사액을 받은 서원이다. 여기에는 김인후(1510∼1560)와 양자징(1523∼1594) 두 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김인후는 조선 중기의 유학자이자 문신으로, 1540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병을 핑계삼아 나아가지 않고 고향인 장성으로 돌아갔다. 시와 문장에 뛰어나 10여권의 시문집을 남겼고, 그의 성리학 이론은 유학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곳에서 지정된 유물은 총 바로가기